피를 마시면 안 된다면서 제 피만 탐내는 뱀파이어 아가씨와 동거 중입니다
1장. 비 오는 밤, 뱀파이어 성의 문을 두드렸다
Chapter 1 Free chapter

1장. 비 오는 밤, 뱀파이어 성의 문을 두드렸다에서는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밤의 숲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낡은 마차 지붕 위로 빗방울이 쏟아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자잘한 북소리 같던 것이, 숲길 깊숙이 들어온 뒤부터는 쇠못을 한 움큼씩 뿌리는 소리처럼 거칠어졌다.
1장. 비 오는 밤, 뱀파이어 성의 문을 두드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니, 내린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밤의 숲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낡은 마차 지붕 위로 빗방울이 쏟아질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자잘한 북소리 같던 것이, 숲길 깊숙이 들어온 뒤부터는 쇠못을 한 움큼씩 뿌리는 소리처럼 거칠어졌다.
바퀴가 진흙탕을 밟았다.
철벅.
흙탕물이 튀어 마차 바닥을 적셨다. 젖은 흙냄새, 썩은 낙엽 냄새, 비에 젖은 말의 털 냄새가 축축하게 뒤섞였다. 찬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카일 브렌의 젖은 외투 자락이 무겁게 흔들렸다.
그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죽 장갑은 이미 빗물을 잔뜩 머금어 손가락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등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손목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감각이 피부 위를 가늘게 기어올랐다.
마차 앞의 늙은 말이 낮게 콧김을 뿜었다.
흰 숨결은 어둠 속에서 잠깐 피어올랐다가, 곧 빗줄기에 찢겨 사라졌다.
“조금만 더 가자.”
카일은 말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렸다.
축축한 털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지만, 그 아래에는 아직 살아 있는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카일은 품속에서 천으로 감싼 의뢰서를 꺼냈다.
양피지는 오래된 것처럼 누렇게 바래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검붉은 밀랍이 찍혀 있었다. 비에 젖지 않게 조심했는데도 습기를 먹은 모서리가 살짝 말려 있었다.
의뢰서를 펼치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씁쓸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상할 만큼 선명한 장미 향이 섞여 있었다.
폭우와 진흙 냄새뿐인 숲길 한가운데에서 맡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하고, 지나치게 달콤한 향이었다.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로젠펠 성까지 물품을 운반할 것.
성 내부의 간단한 수리 상태를 확인할 것.
성주의 허락 없이 폐쇄된 방에 들어가지 말 것.
성 내부에서 본 것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보수는 금화 서른 닢.
카일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성 내부에서 본 것에 대해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귀족 저택 의뢰치고도 유난스럽군.”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빗소리에 금세 묻혔다.
물론 귀족들이 자기 집안 사정이 밖으로 새는 걸 싫어한다는 건 카일도 알고 있었다. 오래된 가문일수록 비밀이 많고, 오래된 성일수록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방 하나쯤은 있는 법이었다.
문제는 로젠펠 성에 정말 귀족이 살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벨트하임 마을 사람들은 로젠펠 성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오래전에는 나흐트로제라는 귀족 가문이 머물렀다느니, 지금은 버려진 성이라느니, 밤마다 창문에 붉은 불빛이 켜진다느니, 성 근처에서 길을 잃은 사냥꾼이 여자의 노랫소리를 들었다느니.
변방 마을의 소문은 대체로 술집에서 태어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세 배쯤 부풀어 오른다.
카일은 그런 이야기를 전부 믿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금화 서른 닢짜리 의뢰가 아무 이유 없이 마을 게시판에 붙을 리는 없었다.
아침에 잡화점 주인 올드릭은 카일에게 물품 상자를 넘겨주며 몇 번이나 물었다.
“카일, 정말 갈 거냐?”
“금화 서른 닢입니다.”
“그러니까 묻는 거다. 금화 서른 닢짜리 의뢰가 왜 우리 같은 변방 마을 게시판에 붙었겠냐?”
올드릭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벨트하임에서 금화 서른 닢이면 작은 집 지붕을 새로 얹고도 남는 돈이었다. 평범한 물품 운반과 수리 확인에 그런 보수를 건다는 건, 의뢰인이 돈의 가치를 모르거나, 의뢰 자체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카일은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가야죠.”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누군가는 가야 하는 게 아니라, 카일이 가야 했다.
겨울을 앞두고 약재값은 올랐다. 지난달 부서진 마차 바퀴값도 아직 다 갚지 못했다. 거기에 올드릭이 말없이 미뤄준 빚까지 생각하면, 금화 서른 닢은 너무 수상해서 거절해야 할 금액이 아니라, 너무 수상한데도 거절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우습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 위험한 곳으로 간다.
카일이 그 사실을 배운 건 오래전이었다.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숲이 깊어질수록 길은 점점 좁아졌다. 양옆으로 늘어선 검은 나무들은 빗물에 젖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잎사귀들이 서로 비벼지며 사각사각, 귓가를 긁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둠 속에서 까마귀인지 올빼미인지 모를 새가 한 번 울었다.
그 울음은 금방 빗소리에 삼켜졌다.
말이 불안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카일은 고삐를 고쳐 잡았다.
그 순간, 번개가 쳤다.
하늘이 하얗게 갈라졌다.
짧은 섬광이 숲 전체를 낮처럼 밝히고, 나무들 너머에 검은 그림자를 떠올렸다.
성.
로젠펠 성이었다.
카일은 고삐를 쥔 채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성은 생각보다 작았다. 왕국 중심부 귀족들이 자랑하는 화려한 성이라기보다는, 오래전에 버려진 경계 요새를 누군가 억지로 귀족의 거처처럼 꾸며놓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덜 음산한 것은 아니었다.
첨탑은 밤하늘에 박힌 검은 못처럼 삐죽했고, 비에 젖은 석벽은 어둠 자체를 깎아 만든 것처럼 보였다. 창문 몇 개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불빛은 따뜻하기보다 오히려 성 안의 어둠을 더 깊게 보이게 했다.
늙은 말은 성문 앞에서 멈추자마자 발굽으로 진흙을 긁었다.
철문 앞은 이미 물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마차 바퀴가 진흙에 깊게 박히며 축축한 소리를 냈다.
카일은 마차에서 내려 짐칸을 확인했다.
나무 상자 안에는 말린 약재, 양초, 보존식, 유리병, 못과 경첩, 작은 망치, 천 묶음, 그리고 주문서에 적힌 몇 가지 생활용품이 들어 있었다.
위협이 될만한 물건은 없었다.
물론 카일이 그런 것을 아예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허리 뒤쪽에는 짧은 검이 있었다. 외투 안쪽에는 접이식 소형 석궁이 숨겨져 있었다. 짐칸 바닥 아래에는 은으로 도금된 단검 한 자루도 넣어두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비가 목덜미를 타고 등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셔츠에 스며들자 카일은 짧게 숨을 내쉬고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문고리는 검은 철로 되어 있었다.
모양이 특이했다. 자세히 보니 박쥐가 날개를 둥글게 말고 있는 형상이었다. 손을 대자 쇠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끝의 감각이 순식간에 얼얼해졌다.
카일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쾅, 쾅, 쾅.
둔탁한 울림이 성 안쪽으로 퍼져나갔다.
빗소리 사이로 그 소리가 길게 번졌다.
대답은 없었다.
카일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이번에는 안쪽에서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발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바닥을 딛고 걸어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공중에서 흔들리며 움직이는 소리였다.
문틈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대한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끼이이익.
귀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카일은 무의식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성 안은 어두웠다.
먼지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오래 닫혀 있던 방에서 나는 눅눅하고 쓴 냄새. 그 사이로 촛농이 타는 냄새와 오래된 나무, 젖은 돌벽 특유의 차가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문을 연 사람이 없었다.
문 안쪽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대신 촛대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떠 있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은으로 된 촛대는 불안하게 흔들리며 카일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세 갈래로 갈라진 촛불은 빗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불빛은 희미했지만, 충분히 이상했다.
카일은 잠시 촛대를 바라보았다.
“환영 인사가 독특하군.”
그가 낮게 말하자, 촛대가 움찔했다.
촛대는 아래로 조금 떨어졌다가, 다시 황급히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뜨릴 뻔한 물건을 급히 붙잡은 것처럼.
카일은 성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젖은 부츠가 대리석 바닥 위에서 미끄러운 소리를 냈다. 바닥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문밖의 진흙과 빗물이 그의 발자국을 따라 어두운 자국으로 남았다.
홀은 넓었다.
하지만 넓은 만큼 더 쓸쓸했다.
높은 천장에는 낡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지만, 촛불은 절반도 켜져 있지 않았다. 붉은 양탄자는 군데군데 말려 올라가 있었고, 벽에 걸린 초상화들은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뒤틀려 있었다.
창가의 커튼은 한쪽이 찢어져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비바람이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올 때마다 천이 유령의 소매처럼 흔들렸다.
카일은 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음산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음산하다기보다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바닥 구석에는 마른 잎이 굴러다녔다. 계단 난간에는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다. 장식용 갑옷 하나는 투구가 삐뚤게 얹혀 있었고, 벽난로 옆에는 장작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받침 접시는 그 옆으로 한 뼘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놓은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떨어뜨린 듯한 위치였다.
고귀한 성이라기보다는, 누군가 혼자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집 같았다.
카일은 고개를 들고 홀 안쪽을 향해 말했다.
“의뢰를 받고 왔다. 벨트하임의 카일 브렌이다.”
목소리가 높은 천장 아래로 번졌다.
카일 브렌이다.
브렌이다.
이다.
메아리가 사라질 즈음, 중앙 계단 위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났다.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 위.
그곳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인형처럼 보였다.
그만큼 창백하고, 조용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소녀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빛을 삼킨 듯 깊은 검은색 드레스였다. 다만 치맛자락이 흔들릴 때마다 그 안쪽에서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이 살짝살짝 비쳤다. 검은 밤 사이로 붉은 장미꽃잎이 스며든 듯한 색이었다.
허리를 단단히 조인 코르셋은 그녀의 가는 몸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냈고, 층층이 떨어지는 긴 치맛자락은 계단 위의 어둠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드레스의 소매는 얇은 검은 천으로 되어 있어, 창백한 팔의 윤곽이 희미하게 비쳤다. 손끝에는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그 위로 촛불이 닿을 때마다 레이스 무늬가 섬세하게 떠올랐다.
피부는 달빛을 얇게 펴 바른 것처럼 희었다.
하지만 카일의 시선을 가장 먼저 붙잡은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새까만 흑발이었다.
젖은 밤보다 더 깊고, 빛을 머금은 흑요석처럼 매끄러운 검은색.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촛불과 함께 살짝 흔들릴 때마다, 안쪽에 감춰진 붉은빛이 드러났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색.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색은 마치 밤의 틈에서 붉은 달빛이 새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 끝으로 갈수록 붉은 기운은 더욱 짙어졌고, 계단 위에 흩어진 촛불과 섞여 묘하게 눈을 뗄 수 없는 빛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러난 두 눈.
루비처럼 붉었다.
탁한 핏빛이 아니라, 잘 다듬은 보석을 촛불 아래에 비춘 듯 맑고 깊은 붉음이었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위험하다고 느껴질 만큼.
카일은 아주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한때 헌터 길드의 견습 추적꾼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짐승과 마물, 그리고 인간이 아닌 것들의 흔적을 구분하는 법 정도는 배웠다. 눈빛. 피부. 발소리. 체온. 냄새.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무의식적으로 흘릴 수밖에 없는 작은 기척들.
계단 위의 소녀에게는 그 모든 것이 이상할 만큼 희미했다.
뱀파이어.
그 단어가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다.
소녀는 계단 위에서 카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분명 위엄 있게 보이려 하고 있었다. 턱을 살짝 들고, 한 손은 가슴 앞에 얹고, 다른 손은 계단 난간에 우아하게 올려두었다. 눈빛도 차갑게 만들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 모습은 꽤 그럴듯했다.
적어도 그녀 옆에서 떠다니던 촛대 두 개가 너무 심하게 흔들리지만 않았다면.
왼쪽 촛대는 점점 기울어졌고, 오른쪽 촛대는 불안하게 빙글빙글 돌았다. 소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카일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네가 의뢰인인가?”
소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히 성주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다니. 인간은 예법을 모르는군.”
목소리는 맑았다.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투만큼은 오래된 귀족처럼 꾸며져 있었다. 부드럽고, 높고, 조금은 과장된 위엄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위험한 건 알겠는데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카일은 젖은 외투의 물기를 손으로 털며 대답했다.
“예법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 빗속에서 성까지 물건을 끌고 오는 예법은 조금 알지만.”
“말대꾸도 하는군.”
“질문에 답한 거다.”
소녀는 잠깐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 짧은 침묵 사이, 계단 옆을 떠다니던 촛대 하나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쨍그랑!
은 촛대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촛불은 바닥에 닿기 직전 사라졌고, 그 대신 검은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올랐다.
홀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소녀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카일은 떨어진 촛대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성의 분위기를 위한 연출인가?”
“그렇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그렇군.”
“의심하지 마라.”
“안 했다.”
“표정이 의심하고 있다.”
“비에 젖어서 그런 거다.”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조금 귀여웠다.
물론 뱀파이어에게 그런 감상을 품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카일은 허리 뒤쪽의 검을 의식하며, 천천히 물품 상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뢰 내용은 물품 배달과 성 내부 수리 확인이다. 주문한 물건은 모두 가져왔다. 확인할 건가?”
소녀는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검은 구두가 양탄자를 밟을 때마다 천이 부드럽게 눌렸다. 그녀가 한 걸음 내려올 때마다 촛불이 아주 조금씩 흔들렸고, 홀 안의 그림자들이 벽을 따라 기어가는 것처럼 움직였다.
카일은 그녀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거리는 열 걸음.
일곱 걸음.
다섯 걸음.
가까이 오자 향이 났다.
장미 향이었다.
하지만 의뢰서에서 맡았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달콤하지만 차갑고, 꽃향기인데도 어딘가 밤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비와 먼지와 촛농 냄새뿐인 홀 안에서, 그 향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소녀는 카일의 앞 세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그녀는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봤을 때는 위엄 때문인지 조금 더 커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눈빛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카일의 얼굴, 어깨, 허리의 검, 젖은 외투, 그리고 목 근처를 차례로 훑었다.
목 근처에서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아주 잠깐.
하지만 카일은 놓치지 않았다.
소녀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너.”
소녀가 말했다.
“피 냄새가 난다.”
카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비 냄새와 말 냄새도 날 텐데.”
“그런 냄새가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 순간, 카일은 확실히 느꼈다.
눈앞의 소녀가 단순한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을.
공기 자체가 조금 달라졌다.
차가운 홀 안에서 목덜미만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이 피부 위를 아주 천천히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도망치거나.
검을 뽑거나.
최소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고.
하지만 카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눈앞의 소녀가 더 크게 흔들릴 것 같았다.
그녀는 그보다 더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소녀는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가렸다.
창백한 손등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다. 붉은 눈동자가 한순간 더 짙어졌다가, 곧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인간의 피 냄새가 원래 이렇게…….”
소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대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카일은 그제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성주님.”
그가 부르자, 그녀가 날카롭게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아직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그럼 뭐라고 부르지?”
“릴리스.”
그녀는 대답하고 나서, 자신이 너무 쉽게 이름을 알려줬다는 걸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정확히는 릴리스 폰 나흐트로제다. 나흐트로제 가문의…….”
거기까지 말하던 릴리스는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고귀한 성주다.”
“카일 브렌이다.”
“알고 있다. 의뢰서에 적혀 있었다.”
“그럼 서로 이름은 아는군.”
“그렇다고 가까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말은 안 했다.”
“말하지 않아도 네 얼굴이 건방지다.”
카일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등 뒤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쾅.
성문이 닫혔다.
카일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열려 있던 거대한 문이 완전히 닫혀 있었다. 빗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문틈으로 들어오던 차가운 바람도 끊겼다.
홀 안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카일은 다시 릴리스를 보았다.
그녀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문이 닫혔군.”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밖에서 안쪽으로 불고 있었는데.”
“그럼 성의 구조 때문이다.”
“성의 구조가 문을 잠그나?”
철컥.
대답하듯 문에서 잠금쇠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한 번.
철컥.
두 번.
철컥.
세 번.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릴리스도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잠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카일은 문과 릴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릴리스는 시선을 피했다.
“……성의 구조가 꽤 철저하군.”
“그렇다. 로젠펠 성은 방범이 우수하다.”
“나를 들여보내자마자 가두는 것도 방범인가?”
“인간은 위험하다고 배웠다.”
“뱀파이어 성에 혼자 사는 아가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릴리스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카일을 향했다.
이번엔 조금 날카로웠다.
“너.”
그녀가 낮게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카일은 잠시 고민했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설픈 거짓말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
그는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붉은 눈. 지나치게 흰 피부. 사람 없는 성. 허공에 뜨는 촛대. 피 냄새에 대한 반응.”
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
“뱀파이어인가?”
릴리스는 숨을 멈춘 듯 굳었다.
촛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홀 안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그녀의 표정에서 허세가 사라졌다. 아주 잠깐,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분노가 아니라 당황이었다. 들켜서는 안 되는 장난을 들킨 아이 같은 표정.
하지만 그것도 정말 잠깐이었다.
릴리스는 곧 등을 곧게 폈다.
작은 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턱을 들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무섭게 보이려고 애쓰는 얼굴이었다.
“인간.”
그녀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멀리서 천둥이 낮게 굴러갔다. 촛대의 불꽃이 붉은 눈동자 안에서 흔들렸다.
릴리스 폰 나흐트로제.
스스로를 고귀한 성주라 소개한, 세상 물정 모르는 듯한 뱀파이어 아가씨.
그녀는 카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본 것은 잊어라.”
카일은 닫힌 성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보았다.
“잊으면 보내주나?”
릴리스는 입을 열었다.
곧바로 대답하려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가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움직였다. 마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귀족식 협박 문구 중에서 지금 상황에 맞는 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몇 초 뒤.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그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카일은 빗물에 젖은 외투를 내려다보았다.
닫힌 문.
어설프게 떠 있는 촛대.
거만한 척하지만 눈에 띄게 당황한 뱀파이어 아가씨.
그리고 금화 서른 닢짜리 의뢰.
아무래도 오늘 밤은,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